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아돌프 히틀러 (문단 편집) === 사치와 [[부정부패]] === [[https://www.richardjevans.com/lectures/corruption-plunder-third-reich/|출처]] 독일 정권은 히틀러의 금욕적인 면을 부각하는 선전을 했지만 이는 철저히 기만이었다. 히틀러는 물욕에 빠져있던 부패한 독재자였다. 아마 빈곤했던 시절의 기억을 못 잊어 이후 돈에 대한 집착이 생겨난 것으로 보인다. 그는 빈 시절만 해도 부모와 친척으로부터 받은 유산과 매달 25크로네씩 나오는 고아 연금이 있었고, 본인도 포스터나 극장 간판 그림 알바 등으로 상당한 추가수입이 있었다. 그러나 오페라나 전시회 관람 등 취미 생활에 돈을 쏟아붓는 통에 이내 거덜이 났고 판매를 도맡던 친구와 관계가 틀어지며 그림 알바도 막혀 엄청나게 쪼들리게 되어 [[노숙자]] 숙소를 전전하는 신세가 되었다. 이후 바이에른 시절에는 웬만한 은행원보다 더 많은 돈을 벌게 되었다. 당시 Fuchsl 평균 월급이 70크로네 정도였는데 아돌프 히틀러의 연수입은 1,200크로네, 즉 월 100크로네 정도를 벌었던 것이다. 나치당 시절에는 당으로부터 받는 활동비와 본인이 끌어모은 후원금 중 일부를 당에 집어넣지 않고 [[횡령]]해서 상당한 재산을 모았다. 대부분 장부에도 없이 익명에 현찰로 받았기 때문에, 좋은 집과 옷에 자가용[* 업무용이라고 우겨서 당에서 뜯어낸 돈으로 중고차를 하나 샀지만, 워낙 낡아 금방 되팔아 버리고 자비로 새 차를 샀다. 대신 운전수는 당비로 고용해 달라고 우겼는데 결국 들어줬다고 한다.]까지 굴리는 그를 세무서가 작정하고 털려고 해도 '다 공무용으로 마련한 것이고 내 수입은 없다'라며 버티는 통에 결국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1920년에는 파산해서 매물로 나온 신문사 '[[푈키셔 베오바흐터|민족의 관찰자]](Volkischer Beobachter)'와 '프란츠 에어 출판사(Franz Eher Nachfolger)'[* 에어 출판사는 집권 후 독일 최대의 출판 재벌이 된다. 나치당이 대주주다.]를 후원자들의 도움으로 인수한 뒤 직접 사장 자리에 앉았다. 표면적으로는 당 선전기관 쯤으로 둘러댔지만 실제로는 거의 아돌프 히틀러 개인 홍보수단에 가깝게 이용했고, 그 수익금도 개인이 차지해 버렸다. 이 외에도 워낙 독선적인 아돌프 히틀러에 반발한 당 수뇌부가 그의 당내 권한을 제한하기도 했지만, 아돌프 히틀러가 오히려 탈당 소동을 일으키는 등 크게 반발하자 결국 아돌프 히틀러에게 매달릴 수밖에 없었던 당이 회계권까지 쥐어주는 등 이전보다 더 큰 권한을 넘겨주게 됐다. 이후 프란츠 에어에서 그의 저서 '[[나의 투쟁]]'을 출판하면서 아돌프 히틀러가 15%의 [[인세]]를 가져가게 됐는데, 초기에는 별 인기가 없었던 책이 집권 후 거의 반강매로 전 국민에게 돌려지면서 어마어마한 수익을 아돌프 히틀러에게 안겨줬다. 집권 전의 아돌프 히틀러는 위대한 지도자라기보다는 일종의 정치적 아이돌로서의 인기가 높았고, 심지어 그의 사진이 담긴 액자나 머그컵 같은 상품이 불티나게 팔릴 정도였다. 다만 아돌프 히틀러가 사진 찍히는 걸 워낙 싫어한 탓에 그의 사진은 품귀 현상을 빚고 있었는데, 무명의 사진사인 하인리히 호프만(Heinrich Hoffman)이 미국 신문사로부터 1,000달러를 약속받고 [[몰카]]를 시도하다 돌격대원들에게 걸려 두들겨 맞는 일이 벌어졌다. 마침 현장을 목격한 아돌프 히틀러는 웬일로 흥미가 동했는지 그를 불러 얘기를 나눴고, 그에게 자기 사진을 독점적으로 찍을 수 있는 파격적인 권리를 약속하고 대신 그 수익 중 10%를 받게 되었다. 호프만의 사진은 대박을 터뜨려서 본인도 돈방석에 앉았지만, 이 역시 아돌프 히틀러의 축재(蓄財)에 한 몫 단단히 하게 된다. 그렇게 전속 사진사가 되고 나서 아돌프 히틀러는 호프만과 둘이서 연설 퍼포먼스를 연구하기 위한 사진을 찍으며 연설연습을 하곤 했다. 우리가 자주 보는 아돌프 히틀러의 사진 중 상당수가 바로 호프만의 작품이라고 한다. 이후 호프만은 아돌프 히틀러의 취미인 미술품 수집도 도맡게 되었는데, 워낙 금전감각이 없었던 아돌프 히틀러에게 그림 값을 부풀려 받아내는 것으로 역시 짭짤한 이득을 챙겼다. 아돌프 히틀러 사진의 인기는 곧 [[우표]]에도 실릴 정도가 되었는데, 호프만은 당시로서는 생소하게도 우표에도 [[초상권]]을 주장해서[* 당시 우표에 자기 얼굴이 들어가는 것은 일종의 사회적 명예로 여겨져 따로 돈을 받는다는 개념이 드물었다고 한다.] 인세를 받아냈다. 우표값이야 대단치는 않았지만 워낙 수요가 많았기 때문에 이걸로 호프만은 떼돈을 벌었다고 한다. 아돌프 히틀러는 총리 취임과 동시에 '내 급여는 전부 순직한 돌격대원 유족들의 연금으로 돌리겠다'고 발표해 큰 호응을 얻어냈다. 물론 인세와 초상권만으로도 그깟 월급 안 받아도 될 정도의 부자였지만. 위에서 쓴 대로 아돌프 히틀러는 1933년부터 온갖 핑계를 대어 단 한 푼의 [[세금]]도 안 내고 있었는데, 이 무렵 국세청은 아무리 봐도 정상으로 보기 힘든 그의 지갑사정을 파헤치기 위해 다시 한 번 만반의 준비를 마치고 있었다. 그러나 아돌프 히틀러의 지시로 국세청과 접촉한 재무차관 라인하르트는 협상에 성공하여 '국사에 바쁜 지도자가 세금 문제로 발목을 잡혀서는 안 된다'는 합의를 이끌어냈다. 결국 아돌프 히틀러의 납세자 카드는 국세청에서 말소되어 아돌프 히틀러의 납세의무는 사라졌고, 그는 총리 급여를 도로 자기 계좌로 돌려버리게 된다. 이미 1933년에만 나치당이 대량으로 구매한 [[나의 투쟁]]을 통해 120만 마르크를 벌었고 1937년에는 자신의 초상화가 그려진 우표에 저작권료를 부과해 1년에 5000만 마르크를 벌었다. 또 독일의 재벌들은 [[정경유착]]형으로 히틀러에 뇌물을 제공했고 독일의 관제언론들 역시 히틀러의 연설을 인쇄할 때 마다 수수료와 로열티를 제공해야 했다. 물론 히틀러의 세금납부내역은 아예 말소되었고 독일 국민들은 히틀러가 총통으로 재임한 이래에 단 한 번도 국가에 세금을 납부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까마득하게 모르고 있었다. 히틀러는 막대한 재산을 바탕으로 자신의 권력을 완성시켜나갔다. 먼저 히틀러를 신뢰하지 않던 [[독일 국방군]] 소속 장성들의 환심을 사야했다. 예를 들어 [[아우구스트 폰 마켄젠]] 원수는 히틀러로부터 토지 면세권을 선물받았고 다른 장성들도 히틀러로부터 엄청난 돈과 명품 그림, 사치품들을 선물받았다. [[하인츠 구데리안]] 장군 역시 히틀러로부터 [[독소 폴란드 점령#s-2.1|나치 점령하 폴란드]]의 937 헥타르의 땅을 부동산으로 선물받았고 평생동안 면세가 보장되었다. 구데리안은 이후로 히틀러의 열렬한 지지자가 되었다.[* Gambetta, Diego (2005). "Black Marks: Hitler's Bribery of his Senior Officers During World War II". In Kreike, Emmanuel; Jordan, William Chester (eds.). Corrupt Histories. Toronto: Hushion House. pp. 518. ISBN 978-1-58046-173-3.] [[게르트 폰 룬트슈테트]], [[페르디난트 쇠르너]], [[카를 되니츠]], [[에리히 레더]], [[에리히 폰 만슈타인]], [[귄터 폰 클루게]], [[볼프람 폰 리히트호펜]] 등의 유명한 독일군 장성들도 탐욕에 눈이 멀어 히틀러로부터 적극적으로 뇌물을 챙겨갔을 정도였다. 유일하게 명확한 사실이 밝혀지지 않은 독일군 장성은 [[에르빈 롬멜]] 정도다.[* 이쪽은 주로 추적 사료로 롬멜과 그의 아내 루시에간에 오간 편지들이 사용되는데 히틀러와 사이가 전쟁 중반까진 각별했던 롬멜이 히틀러에게 받아낸 것 중 가장 큰 것은 1940년 1월 국방군 총통경호대에서 기갑병과로 가고싶다는 소망이 받아들어져 제7 기갑사단장으로 부임하도록 조치 받은 것이다. 당시 대부분 기갑사단의 경우 기병 병과에서 넘어오다보니 예하 장교들이 보병 교관출신이 낙하산으로 내려왔다라며 우려했다고 전해진다. 다만 롬멜은 프랑스 침공에서 이 의심을 완벽하게 풀어버리는 전공을 세운다.]특히 [[헤르만 괴링]]은 부패와 사치의 대명사였다. 이 시기 아돌프 히틀러의 돈 관리를 담당한 것은 은행원 출신의 친위대 대장 [[막스 아만]](Max Amann)이었다. 1차 대전 당시 부사관으로 히틀러의 상관이었던 그는, 탁월한 금전감각을 발휘하여 당과 아돌프 히틀러의 재정을 지켜낸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출판사 인수를 비롯해 온갖 빚 독촉을 연줄로 무마하거나 후원금을 울궈내 돌려막는 수완을 발휘했고, 이런 능력을 인정받아 그는 원내총무 및 출판사 대표 등을 역임하여 아돌프 히틀러의 심복으로 자리잡았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그 역시 자기 돈주머니 챙기는 데 부족함이 없었고, 아돌프 히틀러는 결국 자기 회계관리를 퓌러 대리 및 친위대, 돌격대 대장 [[루돌프 헤스]]의 심복인 친위대 및 돌격대 대장 [[마르틴 보어만]]에게 맡겼다. 보어만은 워낙 철두철미하고 입이 무거우면서도 돈 관리를 철저히 한 덕분에 아돌프 히틀러의 큰 신임을 얻으면서 나치당의 실세 중에 한명으로 떠올랐다. 물론 히틀러의 사치와 부정부패에는 [[약탈]]도 빼놓을 수 없었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독일군은 각 점령지로부터 많은 재산들을 약탈해갔고 수 많은 [[유대인]]의 재산도 역시 나치로부터 몰수당했다. 빼앗은 약탈품을 바탕으로 히틀러→[[나치당]]→[[국방군]]→재벌→민간으로 이어지는 복잡하고 거대한 부패의 고리가 형성되었고 독일 국민들도 큰 이득을 얻었기 때문에 히틀러를 지지할 수 있었다. 처음부터 그럴 생각은 아니였겠지만 [[폰지사기]]에 가까운 [[메포어음]]같은 무책임한 물건을 돈이 부족할 때마다 발행하여 부족한 자금을 충당하였다. 패망이 가까워지자, 아돌프 히틀러는 유서에서 당과 독일 정부에 전 재산을 헌납하고 주변인들에게도 얼마씩 나눠줄 것을 약속했다. 그러나 이 유서를 집행할 보어만은 탈출 중에 전사했고 이후 상속법에 따라 처리되었다. 강제로 강탈한 재산은 원주인에게 돌려졌고, 나머지 재산은 유일한 상속순위자인 여동생 파울라에게 일부 상속된 걸 제외하고는 모조리 바이에른 주정부로 헌납되었다. 독일 정부가 히틀러의 재산을 가져갔으니 결과적으로 유언 자체는 지켜졌다. 개인 재산으로 몇몇 별장들을 가지고 있었다. 독수리 둥지로 불린 [[켈슈타인하우스]]와 베르그호프가 유명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